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는 거짓말에 재능이 없다.
어릴 때부터 곤란한 사람을 쉽게 못 지나쳤던 데다, 버려진 강아지를 신경 쓰다 결국 비가 오는 날에 홀딱 젖은 채로 주워왔으며, 주변인들에겐 과할 정도로 맞춰 주고 신기할 정도로 자기주장이 없는 착한 아이였으니까.
말을 할 때면 쿡쿡 찔려오는 심장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여덟 살 무렵, 실수로 화분을 깨고 구석진 곳에 숨겨두었을 땐 이틀 밤을 설쳤고. 중학교 일 학년 겨울, 전단지를 보고 무작정 학원에 찾아갔을 땐 한 달을 신경 썼으며. 드럼을 그만두었던 열아홉, 웃는 얼굴로 괜찮다 말했던 그는 꼬박 일 년을 잊지 못했으므로.
그래서 그는 늘 답을 회피한다. 거짓으로 꾸미는 것보다 입을 다물기를, 말을 돌리기를, 최후에는 마주하지 않기를 선택한다.
그러니까, 이런 일은 아주 곤란하다.
― 뭐 해?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 같은 거.
아
프
리
마
비
스
타
♬
애꿎은 화면만 계속 들여다보던 건호는 지금이 점심시간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르르 몰려오는 손님들이 있으면 이런 고민을 할 새도 없을 테니까. 3년간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선 열심히 단어장을 들여다보고 있어야 했지만 지금만큼은 뒷전이다.
더 중요한 문제를 풀어야 했다. 그것도 주관식을. 시간제한 안에.
식은땀이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야 어제도 그제도 저번주에도 똑같은 대답을 했으니까. 쿡쿡 찔리는 심장은 구멍이 날 법도 한데 양심은 어쩜 그리 단단한지 여전히 따끔거린다.
나 공ㅂ|
어제도, 그제도, 저번주에도 했던 거짓말이 첫 번째.
사실 알바를 시작해서 지금 편|
절대 말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 두 번째.
넌?|
어차피 질문으로 이어질 대답이 세 번째.
깜빡, 깜빡.
풍선 안에 들어가지 않는 오답들이 얌전히 갇혀 있다.
사실 재수를 시작하고, 알바를 한다고 해서 관계가 달라지진 않을 터였다. 무슨 그런 걸 하냐며 이해를 못 한다던가, 급이 안 맞는다며 거리를 둔다던가, 그럴 시간에 공부를 하라며 잔소리를 한다던가. 연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다는 걸 건호는 잘 알았다.
그렇지만 이건 조금 다른 문제다.
솔직히 말하자면 최고로 울적한 상태였다. 살면서 그런 기분을 많이 느껴본 것도 아니지만 어쩐지 인생에서 이보다 더 불행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 상태로 좋아하는 사람들의 곁에 있다간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예민하게 굴 것 같았고, 그는 그 감각이 싫었다.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웃고 싶지 않았고 본인의 밑바닥까지 남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간 아무도 남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러니까 꼭, 연을 어려워했던 다섯 살 무렵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연은 감정이 표정에 전부 드러나는 스타일이었지만, 그래서 더 그랬다. 표정 하나에 들뜨고 자책하기를 반복했었으니까. 그 시절엔 연이 자신을 떠날까 봐 전전긍긍했었고,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은 건 조금 나중의 이야기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연을 더 알아갈수록 다정한 점을, 무른 점을, 숨기고 싶은 점을 알아갔으니까 고작 대학 하나로 곁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긴 하지만⋯⋯.'
조금 낯선 프로필 사진을 누르면 한껏 스무 살을 만끽하는 밝은 얼굴이 보인다.
그래, 결국 결심한 손가락은 타자를⋯
"저기요. 계산이요."
"아, 죄송합니다!"
⋯치지 못하고. 깜빡이던 세로줄이 검은 화면 너머로 사라진다. 휴대폰을 놓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민건호는 원래부터 놓는 걸 어려워하지 않았다.
뭔갈 간절히 갖고 싶었던 적도, 원했던 적도 없고 희미하게나마 바랐던 것들은 다른 누군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기꺼이 놓아줄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더 생각할 틈도 없이 현실이 닥쳐오면, 독서실의 펜 소리와 편의점의 규칙적인 바코드 소리만이 그가 지금 쥐고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건 도피다.
답장을 하지 못했던 것은 의식하지 않으면 튀어나오는 습관이었어서, 혹은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피하는 게 편해서, 준비되지 않은 채로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어쩌면 만약이 두려워서⋯.
그런 변명들에 파묻혀 있었을 때쯤, 연락이 끊겼다.
예상하지 못했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
꽃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굳이 묻는다면 좋아하는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연은 아니었다. 꽃을 줘 본 적은 없지만, 서랍장 한 켠에 놓여 있는 종이학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사실 이건 지금의 내가 생각하기에도 좀 과하게 감성적이었다 싶긴 한데⋯⋯.
아무튼.
중요한 건, 으레 토론 주제가 되곤 하는 꽃은 쓰레기다 vs 감동이다의 대립에서 연은 전자면 전자를 택했지 절대 후자는 아닐 거라는 소리다.
"음⋯⋯."
그러니까 민건호는 쓰레기를 산 거나 다름이 없다.
공원 벤치의 비둘기들이 혼잣말 소리에 수군거리며 총총 멀어진다. 슬쩍 알림이 쌓인 SNS를 들어가면 분명 익숙한데도 낯선 얼굴이 가득하다.
널 제일 잘 알았던 건 나인데, 제일 가까웠던 사람도 나였던 것 같은데.
새로운 취미도, 친구도, 좋아하는 것들도 생긴 것 같은 지금의 연에게 무슨 선물을 해야 할지 잘 감이 오지 않았다. 최근까지도 갱신됐던 글을 보면 기분이 복잡해진다. 행복해 보여서 안심이 되는 한편, 조금 씁쓸한 마음도 지울 수는 없다. 그러다 보면 생각이 한도 끝도 없이 깊어지는 법이다.
글쎄, 난 처음부터 잘 몰랐던 것 같기도 하고.
넌 원래 그렇게 웃었던 것 같기도 하고.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렵고. 직접 묻자니 대답을 듣기가 조금은 두렵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데. 붙잡을 용기는 없다.
있는 힘껏 발버둥을 치다 보면, 네 옆에 나란히 설 수 있게 되면, 그러다 보면 언젠간 이 거리가 다시 좁혀질 거라고 믿었다.
열 살 무렵의 두 사람은 그랬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좀, 자신이 없다.
그런 마음이 화면이 꺼진 휴대폰 위에 고스란히 비친다. 그는 이내 싱겁게 걸음을 옮겼다.
졸업식 날 학교를 가지 않았던 건 그렇게 큰 의미가 있진 않았다. 하지만 네겐 큰 의미였는지도 모르겠다고, 어정쩡하게 마주쳤던 순간 깨달았다. 그게 왜 이제 와서 후회됐는지.
머뭇거리던 손은 결국 초인종을 누르지 못한다. 내내 힘들지 않게 썼던 두 장의 편지보다 열 배는 짧은 카드를 건네주는 게 더 어려웠다.
내려둔 노란색 꽃다발은 꼭 처음 만난 날을 떠올리게 해서.
휴대폰을 끄고, 커다란 가방을 쥔 걸음을 돌렸다.
♬♬♬
답장이 없었던 생일은 그렇게 지나가고, 길었던 공부도 끝이 났다. 함축해서 몇 번의 고비는 있었지만 그래도 좋은 결과가 나왔다.
PC방에서 합격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거리에 쓸쓸하게 떨어진 피아노를 눌렀던 건 왜였을까. 건반에선 먹먹한 소리만이 난다. 제대로 배워본 적은 없지만 관리가 안 된 게 분명했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낡은 건반을 한 번 누른 건호는 문득 주변을 올려본다.
눈이 내리는 거리는 북적였고, 사람들은 제각기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분명 기뻐해 마땅할 일인데 기분이 복잡했다.
"다녀왔습니다."
새하얀 입김은 곧 눈 녹듯이 사라진다. 삼 주 전에 들어온 집은 여전히 포근하고 따뜻했다. 고시원 생활은 돈을 줘도 다시는 안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귀가 인사를 할 때쯤.
"건호야. 이거 네 거 아니니?"
어깨에 쌓인 눈은 녹아내리고, 스며든다.
"네?"
"연이가 두고 간 것 같았는데. 전해주는 걸 깜빡했지 뭐야."
똑.
머리카락 끝에 달려 있던 물방울이 떨어졌다.
네가 하도 안 들어오니까, 장난스럽게 덧붙여지는 잔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아직 채 녹지 않은 손이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겼다.
그래, 넌 다정하면서 무른 사람이니까. 과분할 정도로 내겐 상냥한.
학교 앞에서 나눠주던 전단지 하나에 음악을 배우러 걸음을 옮긴 이후로, 이렇게 충동적으로 움직인 건 처음이었다.
네가 보는 나는 이런 얼굴이었는지, 그럼 지금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그거 알아, 연아?
지나치지 못했던 구름도, 드럼도, 스무 살의 너도.
사실은 전부 놓지 못한 것 투성이라서.
잘 먹지도 못하는 초콜릿 케이크를 사고, 어울리지도 않는 소주를 들고, 못 견디는 추위에 집을 나서서 자신 없는 뜀박질을 하고. 꽁꽁 얼어붙어 엉망인 얼굴로 가장 처음 꺼낸 말은 뭐였는지, 어떤 정신으로 초인종을 눌렀는지 이제 와선 기억나지 않는다.
만약 네가 이 순간마저 찍고 있었다면 두고두고 웃었을 만큼이나 어설펐을게 틀림없지만, 그래도 상관 없었다.
준비되지 않은 채로 너를 마주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 확신이 들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