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Gavitane R. Eckard
1
도망치세요.
차갑게 늘어진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내게 입을 맞춘 어머니가 뚝, 하고 떨어졌다. 비현실적인 광경이어서 그랬는지 눈물도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흥미로운 말투로 중얼거리는 것 같았는데 무어라 말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비단 내가 어려서의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진득하게 달라붙은 핏자국이 뺨을 훑고 지나갔다.
초점 없는 눈동자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는 걸, 열 살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소름 끼치게 차가운 손가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피가 섞인 기침을 내뱉고 힘이 풀린 다리로 목적지도 모른 채 하염없이 걸었다. 끝없이 쌓인 붉은 색의 길 위로 흰 눈이 내리고, 펑펑 쏟아지는 눈 사이로 시야가 점점 흐릿해져 간다.
깨진 거울 조각들이 발에 채고, 장미 정원의 줄기를 꺾었다. 가시가 손을 찌르고 이미 흉터 투성이었던 손바닥에 줄이 그였다. 잎을 하나씩 떼어내니 만들어진 길은 꼭 잘린 목과 같았다.
기꺼이 고개를 들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다.
걸음마저 나의 의지가 아니었으며 고요하게도 쏟아지는 분수대 사이로 비치는 미소는, 내 얼굴을 하고 있었음에도 섬뜩하게 낯선 감각이라는 걸.
"……아."
미소 사이로 길 잃은 눈물 방울이 떨어졌다.
뒤늦은 숙청의 시간이었다.
2
정원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장미를 볼 때면, 금방이라도 떨어져 길을 만들 것만 같았다. 죽음의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자국이 남지 않은 분수대도, 머리가 어지러운 꽃내음도, 눈이 녹아 여름이 온 그 자리도.
그러나 그는 달랐다. 정말로 그가 정원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정원을 싫어했기 때문에, 그는 내가 싫어하는 짓들만 골라 했기 때문에, 그럼에도 어줍짢게 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책 한 권은 들려주었기 때문에.
결국 숨 막히는 장미꽃 사이에서 책을 읽는 시간이 길어졌다. 매일매일 걸음은 정원으로 향했고, 나는 그때마다 기억하기 싫은 것들을 계속해서 되새겨야만 했다. 정원에는 그런 기억들이 남아 있다. 아버지는 꽃의 이름을 알려 주셨고, 잘린 목이 굴러다니고, 어머니는 책을 읽어 주셨고, 담을 짚은 손이 붉은색으로 끈적거리고, 햇살이 비친 유리잔이 반짝거리고…….
"……?"
일순간 시야가 어두워졌다. 나무 그늘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원단. 빛 사이로 흩날리는 머리카락. 태양을 닮은 붉은 색 눈동자.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두 눈이 맞부딪혔다. 내게 얼굴을 바짝 붙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짝이는 눈은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금세 휘어진다.
"좋아해!"
사랑만을 받고 자란 자는, 결국 사랑을 고하기도 쉬운 법이라.
먼지투성이가 된 드레스나, 잎이 붙어있는 머리카락이나, 처음 보는 사람에게 사랑을 고할 수 있는 눈동자가, 참으로 우스웠는지 모른다.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도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이름이 아니었으니, '나' 또한 새하얀 미소를 지었으리라.
이카르드는 늘 내게 사랑을 고했다.
첫인상은 그야말로 최악이었기 때문에 나는 거리를 두고 싶었다.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도, 누군가가 내가 아닌 나와 대화를 하는 것도, 결국 나는 혼자라는 사실이 싫었으니까.
그런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는 내가 싫어하는 짓들만 골라 했기 때문에, 늘 미소로 맞아 주었고. 그는 내가 싫어하는 짓들만 골라 했기 때문에, 언제나 차를 대접했고. 그는 내가 싫어하는 짓들만 골라 했기 때문에, 이마에 입을 맞췄고. 그는 내가 싫어하는 짓들만 골라 했기 때문에…….
"난 단 한 순간도 너를 사랑한 적이 없는데."
그는 언제나, 내가 싫어하는 짓들만 골라 했기 때문에.
가비타느는 한결같았다.
예의상으로 보냈던 편지에 나를 찾아왔고, 책을 읽고 있으면 옆에서 함께 읽다 잠에 들었고, 가끔은 창문을 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고, 돌아가는 시간에는 내게 사랑을 고했다.
빛 사이로 흩날리는 머리카락. 태양을 닮은 붉은 색 눈동자.
수 십번을 돌아가도 한결같은 네 사랑에 감히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장미 꽃잎에는 불이 붙었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펜을 들고 편지를 쓰는 날이 기다려질 때 즈음에는 이미 두 걸음이 정원 쪽으로 향하곤 했다. 언제나 환하게 웃어주는 네가, 평생을, 영원을, 사랑을, 내게 속삭여 줄 것 같아서…….
자국이 남지 않은 분수대도, 머리가 어지러운 꽃내음도, 눈이 녹아 여름이 온 그 자리도, 장미 담장을 넘어온 너도.
그러니 가비, 나는 정원을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었어.
3
손에 남아있는 흉터는 다시는 새겨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만이 내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였다.
이런 몸이 되고 나서 생긴 상처들은, 처음에는 더딘 속도였지만 흉이 남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가벼운 날은 스치지도 않았다. 손에 쥔 나무 조각과 칼을 번갈아 바라봤다. 분명히 피가 흘러야 할 자리는 너무나도 깨끗했다. 나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정말 나인가? '나'는 정말로, '나'라고 할 수 있나?
네가 사랑했던 건, 정말로 '나'인가?
두통이 잦아졌다.
편지가 오면 그 위로 입을 맞추곤 했다. 함께 섞여 오던 장미 꽃잎을 나는 언제부터 사랑했더라.
겉옷을 걸쳐두고 촛불에 불을 붙였다.
가비타느, 편지는 잘 읽었어요.
이번에 향 좋은 차가 들어왔습니다.
지난번에 했던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건
장갑을 낀 손이 떨렸다.
가비타느, 나를 정말로
종이를 새로 찢어냈다.
가비타느, 답장은
시야가 일렁였다.
가비, 나는
잉크가 떨어졌다. 종이가 까맣게 물들어 간다.
……가비.
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편지는 자주 쓰는 것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더 이어갈 수 없었다. 두려웠던 것이다. 결국 그어내기를 반복한 수십 통의 편지를 모조리 태우고 나면, 쓸 수 있는 말은 하나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진짜 나의 이름을 적는 것이 다였다.
4
도망치세요.
그 말을 언젠가의 누구에게 들은 기억이 있는데, 꼭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어떤 표정으로 건넸더라. 장미 향을 닮은 냄새와, 늘어진 뒷모습과, 떨어지는 머리카락이…….
시계 소리가 들렸다. 두 번째였다.
너는 내게 사랑을 말해주겠다 했고, 나는 결국 다 부서진 몸을 끌어안았을 때야 사랑을 입에 담을 수 있었다. 나는 누군가를 도울 수 없었다. 분수대에 내 얼굴이 비치는 날부터 그랬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언제나.
한 발을 내딛을 수만 있다면.
지난번과는 달랐다. 내밀어진 손이, 쥐어진 체온이, 내게는 구원 같았다. 희망이었다. 그러니 나는, 기꺼이 그 손을 잡고 함께 하고 싶었다. 모든 걸 끝낼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모든 게 끝나고 찾아온 평화는 꼭 꿈 같았다. 또다시 당신의 뒷모습을 보게 될 것 같고, 나는 또다시 모든 걸 잃을 것만 같은데. 그 공기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고, 시답잖은 농담이 들리고, 모든 것이 불타고 차가운 공기가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그러니 이 모든 게 꿈이 아니라면, 나는 네게 듣고 싶은 말이 있어.
"가비."
가비, 당신은 언제나 한결같아서.
"응."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은 변한 게 없어서.
"나를 아직 사랑하나요?"
당신이 살아있는 세상에서,
"대답이 됐어?"
겹쳐지는 체온이, 사랑을 고하는 목소리가 내게 닿아서.
"당신의 기억 속에 있는 건, 내가 아니었는데도?"
결국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어서.
"그것조차 모두 너야."
네가 내게 사랑을 고해준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해도 될까요?"
그래 준다면…….
"평생을 그래 줘."
너를 영원히 사랑한다 말할게.
"기꺼이."
하늘에서는 눈이 내렸다.
돌아가면 장미 정원을 만들 생각이었다.
From.
Snow W. As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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