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an Lake, Op. 20: Act III, No. 21.
막이 오르면 배우가 등장한다.
날아오를 것처럼 부드러운 팔은 천장을 향해 뻗어 나간다. 조명은 눈부시게 흰 드레스를 비추고 박자에 맞춘 발걸음은 가벼웠다. 퍼지는 소리와 발이 딛는 순간에 맞춰 숨을 쉬고, 내뱉는다.
낯설게 뛰는 심장을 꼭 쥐었다. 눈을 깜빡이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그들을 향해 빛나는 박수와 아름다운 꽃다발이 줄을 이었다. 마음에 들었던 극단 무용수에게 줄 꽃에 리본을 묶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손끝에 맞닿은 장미에선 은은한 열기가 느껴졌고, 받고 싶은 것을 남에게 주는 것은 나쁜 버릇이었다.
그러나 교양이라는 명분 아래 이어졌던 관람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더 이상 처음과 같은 반짝임으로 그들을 보기 어려워졌을 때 즈음, 그녀는 그토록 바라던 꽃다발을 원 없이 받아보곤 했다. 다른 점은 그 외의 모든 것이었다.
인공적인 무대 조명 대신 볕이 잘 드는 창문이. 붉게 나풀거리는 무대 커튼 대신 닫아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암막이. 닳고 닳아 낡아 빠진 토슈즈 대신 자신의 의지로는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는 새하얀 발만이.
불쾌한 햇빛 너머로는 웃음 섞인 곡조가 들려 온다. 그 사이에서 은은하게 퍼지고 있는 장미 내음이 견디지 못할 만큼 싫었다. 내려다보던 녹빛 눈동자는 감정 없이 가라앉는다. 피투성이 화병과 부서진 거울 앞에 선 그녀를 본 부모님은 놀란 얼굴로 주저앉아 소리치며 의사를 불렀다. 의미 없는 반항에는 발작이라는 이름이 붙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아, 전부 부러졌으면 좋겠다.
다시는 쓸 수 없을 정도로 산산이 조각나서 두 번 다시 춤을 추지 못하게 됐으면 좋겠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발이 전부 망가진다고 해서 그녀가 춤을 출 수 있게 되는 건 아니었으므로, 이브 샹그리아는 더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The Nutcracker Suite, Op. 71a.
고의냐 아니냐를 묻는다면 그건 고의였다.
어디 가의 도련님이, 아가씨가, 인맥을 넓히려면, 교양을 쌓으려면……. 새가 지저귀듯 내려앉는 목소리를 흘려보내자고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난 처음 하는 학교생활에 드물게 부푼 상태였고, 으레 사람들이 말하는 친구라는 것 정도는 내 마음대로 사귀어 볼 심산이었다.
그러니까, 경박하고 지루한 예의 없는 또래 남자애는 후보에도 없었다는 말이다. 그건 베르무트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었다. 이름이 훨씬 짧았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부드러운 질감이 그늘에서 어설프게 피부를 보호했다. 더위를 조금만 더 많이 탔다면 백 번은 더 쓰러졌을지도 모르겠다. 질투라던가, 동경이라던가. 그런 이름이 붙은 감정이랑은 거리가 멀었다. 미적지근하게 닿아오는 바람에 눈을 감는다. 다리가 부서지든 쓰러지든 전부 죽든 내가 변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랬다면 차라리 조금은 즐거웠을지도.
그 시기의 나는 굉장히 무료했고, 살아가는 의미를 찾지 못했다. 그러니까 내 나름 골라 사귄 주변인들은 부모가 말했던 양상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기대했던 생활과는 거리가 멀어서 집과 학교의 차이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딱 하나.
아직까지 흥미를 느낀 곳이 있었지만, 그조차도 직접 겪어보면 지루해질까 봐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런 의미 없는 시간이 지나갔다.
방향을 트는 것은 의외로 한순간이었다. 고의로 내민 손을 그는 잡았고, 들이치는 바다 내음에 눈을 깜빡였다.
미적지근한 열기가 느껴지는 몸. 장미 향기. 담배 냄새. 헬멧을 벗은 머리카락 끝에선 작은 물방울이 반짝인다. 낮은 목소리가 내게 물어왔다.
"어때?"
빌 베르무트는 첫인상대로 경박했고, 예의 없었고, 집요했다. 그러나…….
"좋아."
지루하지는 않았다.
그런 점이 좋았다.
Suite No. 2 from Romeo and Juliet, Op. 64ter: No. 3.
꿈을 꿨다.
그와 춤을 췄던 날에 대한.
거칠고 투박한 손과는 다르게 끌고 가는 모습은 꽤나 능숙했다. 춤을 춰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발을 그의 신 위에 올려두고 힘을 풀었다. 연초 냄새와 장미향이 섞여 들어와서, 불탄 장미 꽃밭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들이치는 바닷물은 적당히 따뜻했고, 그는 내 손이 차갑다며 웃었다.
서서히 신발에서 발을 떼고 해변을 걸었다. 잡은 손을 놓지 않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조명을 받았다. 우리는 마주 보고 있었고, 서로를 향해 사랑을 속삭였고, 끌어안은 채 막이 내리지 않는 바다 위에서 춤을 췄다.
이런 건 꿈이 아니라 주마등이라고 하던가?
그때처럼 그는 나를 끌어안은 채로 숨이 멎어가고 있었다. 머리에서 손을 떼지 않으려고 했던 노력이 안타깝게도 나 역시 그랬다. 허공에 매달린 몸이 산산 조각나 다시는 춤을 출 수 없게 되었으나, 그녀는 원래부터 발을 디딜 수 없었던 곳이었으므로.
고요한 밤 위로 정적이 찾아온다. 가는 손가락을 뻗어 얼굴을 더듬었다.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너를 알아봤던 건 얼굴 때문이 아니었다. 환하게 웃을 때면 보이는 입 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때면 찌푸려지는 미간. 낮지만 다정하게 울리는 목소리. 미적지근한 열기가 느껴지는 몸. 담배 냄새. 장미 향기.
그런 것들.
비릿한 바다 내음이 몸을 덮듯 감싸온다.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파고들어 얼굴을 묻는다. 감겨 있는 붉은 눈동자 위에 입을 맞췄다.
그게 내가 구할 수 있는 마지막 용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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