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다.
처음이자 마지막 감상. 일 년 내내 겨울인 뤼샤비크는 사시사철 추위를 자랑하지만, 그해 겨울은 유독 버거웠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추위가 이어졌고, 식물은 메마르고 짐승은 단단히 굳어 움직임을 멈췄을 때. 사람들이 사라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마물들과 함께 마을이 무너졌으며, 지역들이 지도에서 하나 둘 씩 지워져갔다. 전국적으로 내놓으라 하는 기사들과 유명 마법사들이 모인 마탑의 꾸준한 연구, 수십개의 길드가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논의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태양이 사라지고 새까만 눈이 가득 남은 겨울은, 그렇게, 영원히.
적막이 감도는 백작저의 저택만이 그 추위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저택 전체에 성에가 끼고 창 너머로는 눈보라의 흔적이 새어 들어온다. 그사이에 유일한 녹음빛은 바닥에 쓰러진 소년의 머리카락뿐.
성년이 되지 않은 해, 소년은 눈을 감았다.
발자국이 남은 자리에 달라붙은 눈이 녹아내리면,
문을 걸어 잠갔던 이들이 하나둘 고개를 내미는 것이다.
누군가는 그를 신의 사자라 불렀고,
또 누군가는 돌을 던지며 기도를 올리곤 했으며,
누군가는 금빛 갈기를 잘라 바쳐야 한다고 말했다.
손가락 열 개가 접힐 만큼의 시간이 지나자,
마침내 모두가 입을 모았다.
이 겨울을 끝내러 올, 영웅이 등장했노라고.
A Thousand Sunflower
천 개의 해바라기
어설프게 엮어낸 화관이 머리 위에 씌워진다. 이름 모를 노란 꽃잎은 익숙한 것이기도 했다. 은화 두 닢을 뜯긴 손바닥은 허전하다.
칠 년에 한 번 열리는 실로아우엘의 축제는 그 규모답게 큰 소음을 자랑한다. 소년은 익숙지 않은 소리에 눈을 가늘게 떴다. 작게 한숨을 내쉬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크게 만들어진 화관이 자꾸만 시야를 가리는 탓에 소년은 서 있는 내내 거슬리는 앞머리를 정리해야만 했다. 귀찮은 것투성이였건만, 그 자리를 피하지는 않는다. 낡은 회중시계를 보고 있으면 약속 시간이 조금 지나 커다란 발소리가 들려온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리온!"
기다리고 있는 건 언제나 소년이었으니까. 오히려 평소보다 빨랐다. 웃는 얼굴의 소녀가 품 안으로 뛰어들면, 그 20분 사이에 일어난 영웅담들을 길게 늘어놓는 것도 일상의 한 조각이었다.
"늦어서 미안! 오는 길에 말이야, 데이지가 저번에 고마웠다며 애플파이를 안겨 주는 거 있지! 그래서 같이 먹으려고 고맙다고 인사했는데 옆집 에드가가 왜 쟤한테만 주냐면서 갑자기 화를⋯."
"응."
시야에 금빛 갈기가 휘날리면 자연스럽게 쥐어진 손에 이끌려 걷는다.
거리는 삼삼오오 모인 인파들로 북적거리는데, 소녀는 날쌘 짐승처럼 그 사이사이를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갔다. 마치 옛날에도 이곳에 와 본 적이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도착한 유명하지 않은 레스토랑 집에까지 이어지는 한 마디는 끊기지 않는다.
"⋯⋯그래서 그때 내가 딱! 고양이를 들고 공중제비를 돌았는데 착지 지점이 애매한 거야. 어떡하겠어? 당연히⋯."
"응."
합쳐서 7.5인 분의 식사가 끝나면 만족스럽다는 듯 입술을 훑는다. 소녀는 끊임없이 말을 이었고, 소년은 끊임없는 말을 들었다. 지금이 지나면 다시는 이어지지 않을 것처럼.
그래. 그건 두 사람 분의 일상이었고, 약속이었고, 저주였으니까.
"⋯⋯그랬더니 브루노가 그러더라. 다음번엔 팔씨름을 하자고! 처음 만났을 때도 똑같은 말을 했었는데, 계속 도전하는 모습은 정말 보기 좋아. 너도⋯ 이봐. 리온, 듣고 있지?"
"듣고 있어."
보답으로 받은 애플파이가 입술에 닿아 오면, 망설임 없이 입을 벌려 먹는다. 단 것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지 코끝이 미세하게 찡긋거렸다.
"달아!"
"애플파이니까."
소년은 그 사실을 알았다. 좋아하지 않는 음식을 흔쾌히 웃으며 받아올 만큼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도. 싱겁게 덧붙이고는 나머지 한 개를 입에 넣으면 사과 향이 쌉싸름하게 퍼진다. 시나몬 탓이겠지.
"그렇지, 애플파이니까."
손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던 소녀가, 담장 아래로 뛰어내렸다. 의자에 앉아 한 입 베어 문 애플파이를 들고 있던 소년은, 그를 올려다본다.
"리온."
녹음빛이 담긴 눈동자가, 소년을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는다.
"아직도 사과 싫어해?"
"뭐?"
"하하!"
순간 일몰하는 태양이 뒤로 비친 탓에, 소년은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찡그린 시야를 한 두 번 깜빡이고 나면 영문 모를 소리를 하던 소녀는 늘 그랬던 것처럼 웃는다.
소년을 끌어당긴다.
앞장선다.
나아간다.
잠에 들지 않는 일은 어렵지 않지만,
가끔은 네가 읽어주던 동화책이 그리워.
.
마을의 곳곳에서 기도 소리가 들렸다. 축제의 인파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분수대가 있고, 붉은색 동전을 던지는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염원을 담아 눈을 감았다.
소년에게는 던질 동전이 더 남아있지 않았기에 그 분홍빛 시선은 태양을 좇았지만, 소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소년을 향해서 입을 맞춘다. 맞잡은 손이 뜨거웠다.
"나, 알고 있어."
'나'와 '너'는 모르는, '우리의' 세계에서 했던.
"유리아."
내가 아는 너는 나를 그렇게 부르지 않는데도, 어느 세계의 너는 나를 그렇게 불렀을 터였다. 목에 닿지 않는 녹음빛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흔들렸다.
그리하여, 소녀는 날붙이를 쥐고.
"응, 리온."
"……유리아. 행복해?"
닿아오는 금빛 갈기가 간지럽다. 소년은 온기가 익숙하지 않았는데도 그리웠다. 그건 소녀도 마찬가지였다.
"리온."
휘어지는 입술이 답한다.
치켜 올려진 검이 방향을 정한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처럼.
"돌아가야 해."
어디로?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눈이 내린다.
소년은 눈을 감는다.
그래, 그건 어느 세계의 일상이었고, 약속이었고, 저주였으니까.
진짜로 뿔이 달린 마왕은 어때?
그래, 물리쳐야겠다는 사명감이 들 만큼.
사악한 것 같아?
질척, 질척.
발자국이 남은 자리에 달라붙은 눈이 선명한 핏덩이와 섞여 기분 나쁜 소리를 낸다. 지도에서 지워진 마을에선 더 이상 아무도 문을 잠그지 않는다. 고개를 내미는 대신 바닥에서 나뒹굴 뿐.
이가 빠진 검을 차고 사이를 걸어가는 소녀는 어쩐지 지친 모양새다. 손에는 사람인지 마물인지 모를 형체가 반도 남지 않은 채로 들려 있다. 그마저도 한 걸음마다 뚝뚝 떨어져, 바닥에 닿는 순간 지독하게도 섞여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위로 입술을 내리웠다.
천천히 고개를 들면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난다. 매번 바라보기만 했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처음일 터라서.
세상의 빛을 받은 물방울은 쉴 새 없이 흘러내리지만, 달래주는 방법도 멈추는 방법도 가르쳐줄 이가 남아있지 않았다.
진작 수명을 다해 버린 어머니도. 이유를 알고 지키기 위해 도망쳤던 아버지도, 끝내 '아버지'의 행세를 하던 그것도, 어쩌면 언젠가 그의 곁에 있었을 동료도, 가족도 남아있지 않아서.
소녀는 그 형체가 제 연인이라도 되는 것마냥 소중하게 안아 들고 있었다.
바람이 속삭인다.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응, 알고 있어."
다 타버린 손끝은 녹음을 쥘 수 없다는 걸. 한여름의 공기를 잡아둘 수 없는 것처럼. 낡은 정원 앞에 도달한 그는, 한참을 자신의 손을 내려보다 차고 있던 칼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래도, 나아갈 수밖에 없는 거야."
'영웅'은, 그 누가 자신을 기억하지 않을지라도, 걷는 것을 멈추지 않아야 하니까.
곁에 있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곁에 있었을 사람들을 위해, 곁에 있어 줄 사람들을 위해.
구멍 난 물감처럼 떨어지던 검은 형태는 이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돌아보면 남은 건 그림자처럼 늘어진 검은 길뿐.
"사랑해."
소녀는 눈을 감는다.
"영원히."
흠집으로 이어진 길들 사이로 황금색 빛이 하늘을 향해 솟구치기 시작했다. 한 마을을, 한 지역을, 한 나라를. 이어낸 거대한 사자 모양의 마법진이, 거대하게 감싼 빛기둥이, 결국 모든 곳을 채워내고 나서야 아름답게 부서져 내렸다. 생명의 씨앗으로 변한 조각들이 하나하나 땅에 흩뿌려진다. 맞닿은 대지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움트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겨울의 끝, 녹아내린 눈은 사라지고, 하늘에는 빼앗겼던 해가 떠오르고야 마는 것이다.
그래,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함께 할 수는 없으므로.
사자(使者)는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그는 가끔 죽은 것처럼 잠을 자곤 했는데, 어쩌면 별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옅은 웃음과 함께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로드리온, 나는 가끔 네가 나오는 꿈을 꿔.
난 너의 자란 모습을 알지 못하는데,
나보다 한 뼘은 커진 너를 올려다 봐.
너는 처음 보는 얼굴로 웃고, 나는 네게 입을 맞춰.
너는 나를 기다리고, 나는 네게 돌아가.
신기하지?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 할 텐데, 울고 있잖아.
살랑, 살랑.
느껴질 리 없는 따스한 바람에 붙였던 눈을 뜬다. 내려 묶은 머리는 길이를 유지하기 위해 다듬은 적은 있어도 목 위를 올라간 적이 없다. 곁에서 얼굴을 붙이고 있던 고양이 한 마리가 인기척에 따라 깨어난 듯 책상에서 떨어진다.
바람 탓에 흩뿌려진 서류를 발견하면, 제일 먼저 나오는 건 한숨.
분명 창문을 단단히 닫아 뒀는데 어디로 들어온 건지.
그 모양새가 꼭 누군가 찾아와 한바탕 뒤집어 놓고 가버린 것 같다. 눈과 풀이 뒤섞여 아름다운 추위를 자랑하는 이 백작저의 꼭대기 층에 남아 있는 것은 저 홀로이니, 결코 그럴 일은 없겠지만서도.
하고 싶어서 시작했던 일은 아니지만, 떠밀려 앉게 되긴 했으니 어쩔 수 없이 저 서류들을 주워내긴 해야 했다. 그는 무감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고, 움직임에 맞춰 멀어진 고양이가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원래 키우던 녀석이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
그러니, 당연하지 않은 것은 창밖의 풍경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모를 수천 개의 금빛 꽃잎이 눈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원체 놀라는 일이 거의 없는 분홍빛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꼭 몸을 감싸듯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걸음을 옮겼고, 창문을 닫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어쩌면 어느 세계의 그는 당장이라도 떨어질 수 있을 만큼이나.
"가깝네."
중얼거리던 목소리에 대답하듯 뺨에 작은 꽃잎이 스친다. 자연히 한쪽 눈을 감았다가도 떨어진 꽃잎을 손으로 주워낼 수밖에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노란색으로 뒤덮인 산이 그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냈다.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 피는 꽃은 아니지만, 꼭 근처에 피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좋아했던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기억에 남았다. 겪어보기라도 한 것 마냥⋯⋯.
그래서 그는, 리온은, 으레 사랑이라 불리는 색을 닮은 눈동자는, 한참동안 그 풍경을 담아둘 수 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 처럼.
결국 쥐어낸 금빛 꽃잎이 책 사이에 끼워진다. 시간이 지나도 시들지 않을 것 같았으므로.
그 너머로 찾아올 수 있는 건 꼭 탄 냄새와 같은 온도의 바람과 피지 않는 기다림, 길 가던 고양이 뿐인데도 불구하고.
가볍게 흩날리는 머리카락에 다시 한 번 눈을 감는다.
봄이 돌아왔다면, 창문을 닫아두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으니까.
그리하여 사람들은 말했다.
이름 모를 영웅에 의해, 겨울의 다음이 찾아왔노라고.
천 송이의 해바라기가,
앞으로도 그 자리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영원히 시들지 않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