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은 관통이었던가?
두 번째는 낙사였지.
세 번째는 검에 베여 죽었고,
네 번째는 너를 지키다 눈을 감았어.
다섯 번째는 글쎄, 네가 알고 있는 사고였나.
그녀의 죽음은 처음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에게는 처음이겠지만.
그 수백 번의 세계에서, 스노우 화이트 애셜은 단 한 번도 가비타느 레미엘 이카르드보다 먼저 삶을 마감한 적이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다음은 몰라. 레미엘의 죽음 같은 건 내겐 의미 없거든.
하지만 으레 그는 의미 없는 것들을 사랑하곤 했다. 여름의 장미 정원을, 가죽 커버 사이에 꽂힌 책갈피를, 차마 답장을 적지 못한 편지지를, 자신을 바라봐준 사람들을.
그러니 스노우, 네가 사랑하는 것들은 전부 너를 먼저 떠나 돌아오지 않을 거야.
어떤 세계에서도 너는 혼자 남게 될 거야.
그게 나의 마지막,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저
주
받
은
겨
울
이 가비
환하게 웃는 미소 곁으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였다. 발걸음은 끊길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타당했다. 그녀를 사랑한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았으니까. 비에 진득하게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거슬린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로, 쉴 새 없이 들이밀어지는 카메라와 마이크를 바라보다 문을 닫았다.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꼭 한마디씩 던지곤 했고, 그는 미동 없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지독한 겨울이었다.
❄
빛을 받은 은색 안경 줄이 찰랑인다.
동전을 쥐어 본 것은 처음이었다. 불쾌한 금속 냄새가 손에 밸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구걸하듯 받아온 동그라미 열 개를 차곡차곡 집어넣고 나면, 머뭇거리던 손가락이 익숙한 번호를 하나씩 눌렀다.
결혼을 앞둔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의 일이었다. 그건 사고였고, 불행이었으며, 어찌 보면 운명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새 야위어진 손가락 탓에 헐거워진 반지를 기어코 왼손 약지에 낀 것은 미련이었다.
견딜 수 없는 일은 없다는데, 그는 못내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모든 일을 견디고 나도 제게 남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기어코 두 다리를 옮기고, 식사를 하고, 일상을 살아가는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자리를 지키고 가만히 서 있는 일도, 차마 원망하지 못해 건넨 위로를 잘 받아 두는 일도, 걱정 섞인 손짓을 뿌리치지 않는 일도, 네 생각을 하지 못하는 일도.
추락과 함께 박살 난 휴대폰의 액정이 켜지질 않았다. 사진이라도 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그 모든 게 다 거짓말 같아서,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도련님이 미친 것 같다는 소리를 삼십 번쯤 듣고 뛰쳐나온 길거리는 한산했다. 갑작스러운 소나기로 저들끼리 비를 피하기 바빴으니까. 그는 정말 비가 오는 날이 싫었고, 눈이 오는 날이 싫었고, 너무 햇빛이 짙은 날도 너무 우중충한 날도 싫었다. 반쯤 열린 창문을 견딜 수가 없었고 소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면 귀를 막았다. 불시에 찾아오는 신체 접촉은 얼굴을 구길 만큼 혐오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는 비를 맞았다.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몸을 던졌고, 높은 목소리가, 조금은 높은 체온을 그리워했다. 끝나지 않은 질긴 생을 기어코 이끌어 전화 부스를 찾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연결된 전화에서는 어색한 기계음이 흘러나온다. 제아무리 미쳤다 한들 당신의 목소리로 착각하지도 못할 만큼이나 선명하게.
그럼에도 그는 말을 걸었다. 말마따나, 미쳤기 때문에.
"가비."
―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가비."
― 다시 확인하고 걸어주십시오.
"나, 당신이……."
― 지금 거신 번호는…….
"보고 싶어."
나를 안고 사랑한다 속삭여줘. 당신을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그럼 난 더 이상 울지 않을 수 있을 텐데.
❄
들고 있던 흰색 전화기를 내려두면 부스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와 연결 안내음이 섞여 울린다. 밤인지 낮인지도 모를 하늘이 빗물을 마구 뱉어 냈다. 떨군 시선이 느릿하게 위로 올라간다. 눈이 맞는다. 숨이 멎는다.
그러니 분명한 것은, 착각이 아니라고.
빛 사이로 흩날리는 깃털 같은 머리카락. 태양을 닮은 붉은색 눈동자.
눈앞의 탐스러운 입술이 달싹인다.
스노우.
하하!
육성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틀림없이 환영이라고 생각했던 네 목소리가 선명히 귓가에 꽂혀서, 망설일 틈도 없이 당신을 안아서,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에 안심하는 자신이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어서. 그 어떤 이유도 아니었다. 순수한 기쁨.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을 다시 만난 것에 대한 희열과 흥분.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거짓이다.
"가비."
"스노우."
"정말, 정말 당신이네요."
손을 쥐면 여전히 온기가 전해져 와서, 그는 얼굴을 파묻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기업의 하나뿐인 후계자는, 기자들의 말대로 미친 게 틀림없다.
분명한 당신의 목소리로 속삭이는 것은 내 이름이 아니어도 돼.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을 만큼.
그러니까, 내가 악마에게 넘어간 건 온전히 자의라는 말이야.
❄
똑, 똑.
밤늦도록 그치지 않을 비가 창문을 때립니다.
진동 소리가 문 밖에서 어렴풋이 들려옵니다.
"은백설이야?"
"가비."
문을 열면, 문 너머의 그 얼굴이 유독 낯설게 느껴집니다.
"비 맞았어? 우산도 있는데 왜 젖었어!"
"바람이 많이 불어서요."
"그렇다고 이렇게 젖어? 안 그래도 몸도 약해서 감기 잘 걸리는데!"
당신을 바라보던 그가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걸칩니다.
가비,
오늘은 결혼 전야.
난 아직도 당신의 죽음을 봐요.
"그럼, 날 찾아와 줄 거잖아요."
떠나버린 당신의 어제를 만나러 가요.
밤늦도록 그치지 않을 비가 창문을 때립니다.
이름 모를 누군가가 남긴 저주라고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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